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 하피즈 (문단 편집) === 치세 === 그렇게 두달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신께서는 이슬람 공동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이맘 없이 두지 않으신다는 이스마일파 교리에 입각한 주변의 권유에 따라 압둘 마지드는 칼리파 알 하피즈 리딘 알라[* 하나님 종교의 수호자]로 즉위하였다. (1132년 1월 23일) 이는 파티마 조의 역사상 처음으로 권력이 부자 세습되지 않은 경우였고, 따라서 정통성 부여를 위해 '빛을 가렸던 구름을 걷어낸' 중흥 군주로의 권리를 강조하였다. 알 하피즈 본인도 이러한 사태를 예감한 알 아미르로부터 비밀리에 지목을 받았고, 역시 미래를 내다본 알 무스탄시르도 자신의 부친을 왈리 아흐드 알 무슬리민이라 불렀다고 주장하였다. 그외에 무함마드에서 사위 알리로의 직접적이지 않은 세습 또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논리로 활용되었다. 한편 알 하피즈의 계승은 파티마 조의 영토 내에서 비교적 순조롭게 수용되었다. 다만 예멘의 제후 [[아르와 앗 술라이히]]는 앗 타이브를 이맘으로 지지하며 이스마일파는 더욱 분열되었다.[* 술라이히 조와 대립하던 함단 조와 주바이르 조와 같은 기타 예멘 왕조들은 그대로 알 하피즈에 복속하였다] 불안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알 하피즈는 과디르 쿰과 같은 쉬아 행사들을 파티마 조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로 바꾸었다. 또한 처음부터 친정에 나서는 대신 와지르들을 임명해 국정을 맡겼고, 동시에 그들을 면밀히 주시하였다. 그의 첫 와지르는 알 아흐달의 맘루크 출신으로 알 아미르 대에 비서실장 (사힙 알 밥)을 지낸 아르메니아인 야니스였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야니스는 알 아미르 시절 근위대의 절반을 처형하고 야니시야라 불리는 사병을 조직하였다. 다만 그는 재상에 오른지 9개월만인 1132년 말엽 사망하였고, 알 하피즈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야니스 사후 알 하피즈는 새로운 와지르를 선임하지 않고 일종의 회계 부서인 디완 앗 타흐키크 (감사원)의 장관 유한나 이븐 아빌 라이스마저 해임하며 왕권 강화에 나섰다. 또한 외국계 대신 현지인들 사이에서 인망이 있는 샤리프 (무함마드 후손)들을 등용하여 지지 세력 확보에 나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